사회적 디톡스

퇴사하겠습니다.

부득불 퇴사를 택할 만큼 좋지 못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피고용자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을 택했습니다.

몇 가지 이야기들이 오고 가다 보니 ‘이제 내 붓을 잡을 때’가 되었음을 더 확실히 느꼈습니다.

그렇게 저는 며칠 만에 자연인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택한 결정이고 잘했다고 스스로 위로했습니다.

‘일단 놀자’

아무 생각 안 하고 일주일만 놀기로 했습니다.

알람이 오는 것들을 지우기 시작하고 이것저것 로그오프했습니다.

어느 날 강남에서 지인들과 만나 술 한 잔 마시고 거리를 좀 걸었습니다.

그러던 중 메시지 진동에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고,

그 전화기는 마치 ‘그래, 나는 아스팔트에서 왔어!’ 하는 듯 자유 낙하하며,

빈틈 하나 없이 바닥과 쭤업 달라붙는 소리와 함께 운명하셨습니다.

보통의 경우 액정 수리하면 쓸 수 있는데 이 번엔 제 조작과는 상관없이

깨져버린 액정 뒤로 마치 유령 같은 존재가 심폐소생술을 시전하듯 비밀번호를 제멋대로 눌렀다가

어떤 메시지가 떴다가 다시 뭐가 왔다 갔다 하다가 비밀번호를 누르다가를 반복했습니다.

며칠 뒤 사설 수리로 액정을 고쳤지만 폰은 아이폰 할아버지도 못 푸는 락에 걸려있었습니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여러 차례 비밀번호를 풀려고 시도한 폰을 영원히 잠가 버리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 폰에 안에 있는 다양한 저작물의 저작권자이자 소유자이자 많은 시간을 함께한 동반자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본인의 폰을 풀 수 없는 지경. 도대체 누구를 위한 개인정보 보호인지요.

그렇게 퇴사하고 쉬기 시작한 며칠 안되는 날에,

사회생활을 통해 쌓아온 연락처들과 값어치를 환산할 수 없는 추억이 담긴 사진들,

틈틈이 기록하면서 나름 스스로를 기특해했던 아이디어 메모들은 모두 리셋되었습니다.

어떤 암시라도 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것처럼요.

며칠 동안 복구를 위해 여기저기 다니면서 결국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진이 무척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복구 방법을 찾고 있고 애플의 정책 변경도 바라고 있습니다.

모아놨던 아이디어들도 아까웠지만

또 생각나지 않는다면 전 ‘내 일’을 할 자격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 크게 걱정되지 않았습니다.

그중에 연락처가 없어진 것은 차라리 개운했습니다.

구글에 몇 년 전 업데이트를 하면서, 리멤버에 저장된 분들이 많이 계셨지만,

새로 장만한 핸드폰에 직접 기입하면서 연락처를 채우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연락해 주시는 분들만 저장해 놓고 싶기도 했고요.

연락처가 많은들 연락하는 분들은 한정되어 있고, 그래봐야 깊이도 얕은 관계도 많았습니다.

이 번 기회에 자의든 타의든 시원하게 정리하고, 리프레시 하는 방법도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끔 연락 주시는 분들이 ‘내 번호도 저장되어 있지 않구나!’ 라고 투정하셔도

그 투정이 나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감사했습니다.

혹여 저의 연락을 기다리는 어떤 분이 계실지 모르겠으나 혹시 계신다면,

일단 저는 지금 저의 시간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둘째로 저는 지금 전화번호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셋째로 저에게 연락 주시는 분들에게 더 고마움을 많이 느끼고 있는 시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넷째로 언젠가는 제가 님의 전화번호에서 저장되어 있지 않더라도 ‘어떻게 내 번호도 안 갖고 있느냐’ 따지지 않겠습니다.

다섯째로 ‘제 연락을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홀가분한 기분입니다. 여러분께 연락처 디톡스를 권해봅니다.

누굴 지울지 모르시겠다면 한꺼번에 통으로 지워보는 것도 권합니다.

겁나는 일인데 겁내지 않으셔도 좋을 것 같아요. 필요한 연락은 다 옵니다.

20230102-3 874 0 8000 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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